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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우수상 수상작 (에세이)>

 

저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아닌 그저 평범한 학생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누군가의 삶에 한 부분에 작은, 아니 혹은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제 삶의 큰 터닝 포인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삭막한 21세기 사회에서 주변으로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돌리면 우리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저의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삶으로의 개입이 두렵고 낯설게 느껴지실 머뭇거리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방관자들에게 제 글이 용기를 북돋아 그들도 그들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던 그날, 정적을 깨는 진동소리에 그 날 하루는 여느 날과 다른 하루가 된다. 전화를 받으면 늘 딱 한마디를 했다. “또야?” 그러면 잔뜩 잠긴 목소리로 간단한 대답이 들려온다. “. 혹시 옷이나 외투 좀 가지고 나올 수 있냐?” 짧은 통화를 뒤로하고 옷가지 몇 개를 챙겨서 나갔다. 집 밖 몇 분 거리에 있던 외진 골목 어귀에 위치한 편의점 앞 계단에 정말 얇은 티와 바지만 입고 나온 너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떨고 있는 너를 보고 나는 또 묵묵히 외투를 덮어주고는 늘 그렇듯 편의점에서 1+1하는 캔 커피를 사들고 나와서 네 옆에 하나를 놓고 내 것을 따먹었다. 내가 캔을 따는 소리에 맞추어 고개를 드는 너의 얼굴은 항상 하나씩 혹은 몇 개씩 생채기가 나있었기에 그 날도 역시 나의 눈은 요리조리 너의 상처를 살피기에 바빴다. 오늘은 왼쪽 뺨이 부었고 입술이 터졌네.

 

 

내 단짝 이였던 그 녀석은 종종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러면 그날은 녀석의 아버지라는 분이 술을 드신 날이 분명했고 그러면 또 어김없이 내 친구에게 손찌검과 폭언을 일삼았을 것이라는 걸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식의 폭행과 폭언이 이루어지기에 이 아이가 이 추운 겨울에 맨발에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도망을 나왔을까 생각을 하면 상상을 하다가도 도저히 나로서는 어림짐작도 불가능한 이야기와 그림들이 펼쳐져서 이내 머릿속을 까맣게 지웠다 또 다시 그렸다를 반복했다.

 

 

오늘은 뭐였는데?” 애써 담담히 물으면 친구는 또 담담히 우산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요즘 들어 잦아진 녀석의 도망에 넌지시 물었던 날도 있었다.

 

너 신고하거나 아예 아빠랑 따로 살 생각은 없냐?” 내 물음에 한참을 공허히 허공을 보다가 친구가 던진 답은 그러면 나 고아하라고?”

 

녀석의 어머니는 녀석이 어릴 적 이혼 후 집을 나섰고 이후에 계속된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으로 몇 년 전 성인이 된 언니는 집을 떠나 혼자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언니도 형편이 어려워 동생을 돌보기엔 무리가 있었을 뿐더러 친구는 혼자 남겨질 아빠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을 돌보는 유일한 가족이 사라지는 은연중의 두려움 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밉지 않냐고 물을 때면 친구는 미워도 어쩌냐 가족인데 라는 대답을 했다.

 

 

그날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몇 시간이 지나고 친구 아버지가 주무실 시간이 되면 녀석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면 난 집에서 챙겨 나온 후시딘 같은 약을 좀 발라주고 가끔은 반창고를 챙겨주며 녀석의 개인 간호사 역할을 했는데, 난 그때도 아니 그 이후에도 그 사건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녀석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자로 춥다. 조심히 가라는 답장을 항상 보냈는데, 사계절 내내 저 문장을 똑같이 써서 친구가 항상 뭐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친구가 넌 왜 항상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내냐며 복사 붙여넣기 아니냐고 여름까지 그런 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냐 섭섭해 했었는데 난 그저 그냥이라고 답했다.

 

그 친구를 그렇게 다시 집으로 보내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항상 추웠다. 그 녀석에게 조금이나마 감정 이입을 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는 매번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쳐 나왔다 결국엔 터벅터벅 그 집으로 돌아가는 녀석의 하루하루가 항상 춥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그러다 일이 터지고 말았다. 조별과제가 있던 날 이였다. 원래 학교에서 전달해줬어야할 자료들을 전해주지 못해 직접 친구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다행히 저번에 잠깐 가봤던 그 길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집 근처 골목에서 보기로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냥 가. 내가 나중에 너희 집으로 갈게문자를 받고 돌아서려는 순간 뭔가 불안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녀석의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한 중년남성의 고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네년도 니 애미랑 언니처럼 애비 버릴 년이라며 하는 짓이 꼭 지 애미를 닮았다는 소리가 들리는 저 집. 그래 바로 저 집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막상 집에 보이는 어귀에 도착했는데 겁이 덜컥 났다. 계속 머뭇댔다. 머릿속으로 수천가지 가능성들을 마구 그려보며 그 상황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려보는데 계속 엉망이 되었다. 들어갈까 돌아설까 수백 번을 고민하던 그 때 쾅 하는 소리랑 같이 친구가 대문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산발이 된 머리로 대문 밖에 털썩 주저앉은 친구를 향해 소리치며 다가오는 저 사람. 저 사람이 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람이구나. 우리 부모님이 나를 볼 때와는 다른 눈으로 저 분은 녀석을 보고 있었다. 원망이 가득한 화가 가득찬 눈으로 친구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저 분. 집에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보지 못했는지 몇 차례의 폭행이 이어졌고 나는 멍해졌다. 친구는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잘못했다고 빌고 있었다. 나는 안다 저 아이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저 잘못했다고 하는 게 저 아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을 나는 너무 잘 안다. 그 때 그 친구의 눈을 본 순간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 있던 다운증후군 남자아이가 선생님께 했던 말과 행동이 겹쳐 보였다. 그때도 그 아이는 잘못이 없었다. 그냥 말 몇 마디면 끝날 그 문제를 그 선생은 그 아이의 장애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라는 연약함 때문인지 반 아이들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교실 구석에 몰아넣고 발로 아이를 계속 밟고 찼다. 그 아이가 선생님 다리를 잡고 잘못했다고 빌던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 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에 그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한 어른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일어난 폭행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후에 계속 다짐했다.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소리를 내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손을 내밀어 누군가를 안전한곳으로 숨겨줄것이라 다짐했었다.

 

그래서 그 때 그 아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빌고 있는 친구를 보며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울고 있는 친구 이름을 부르곤 손을 잡고 무작정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서 인적 드문 카페에 친구를 앉혀놓고 찬찬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녀석이 진정으로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아이의 간절한 그 하나를 너무나 지켜주고 싶었기에 녀석의 이야기와 의중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만 이야기를 하면서 간절히 원했던 것은 이 녀석이 단 한번이라도 행복하게 미래를 그릴 수 있기를, 그런 하루하루가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후에 우리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고 녀석이 아버지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았기에 경찰 측에서는 일단 우선적으로 친구의 안전을 위해 아버지와의 즉각적인 분리를 추천했다. 지역아동관리 기관을 통해서 친구는 한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보호센터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고 친구의 아버지는 센터와 오랜 상의 끝에 어렵겠지만 알코올중독 및 충동장애 치료를 받도록 해보겠다는 결심의 의지를 내비춰 주셨다. 그렇게 한동안 친구는 그 아이의 마지막 끈 이였던 가족과 떨어진 채 생활을 이어나갔다. 말 수가 부쩍 적어진 친구를 보며 나는 하루에 수십 번도 나의 선택이 옳았는지 나의 선택으로 친구가 더 큰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뜬금없이 , 고맙다는 말을 내게 해왔다. 너무나 두서없는 그 말에 나는 뭐래라며 퉁명스럽게 받아쳤지만 뒤에 따라오는 친구의 말에 뭔가 울컥거리는 마음을 숨길길이 없었다.

 

 

나 사실 어릴 때부터 엄마도 없었고 그래서 아빠한테 되게 집착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거든. 엄마 나가고 언니랑 둘이서 아빠 기다리면서 아빠 오면 같이 밥 먹고 그래봤자 1년 정도지만 그래도 그 기억이 난 되게 행복했어서 어떻게든 나 혼자서 노력하면 그렇게 다시 돌아갈 수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노력하면 된다는 기대보다 도움을 청하기 무서웠던 것 같아. 아무도 도와줄 것 같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친구의 긴 이야기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저 너무 무서웠고 도와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온 아버지를 내가 이길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을 것 같다는 무의식.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잘한 거구나 라는 확신이 들면서 처음으로 혹시나 내가 친구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라는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안도의 마음으로 눈물이 계속 흘렀던 것 같다.

 

 

후에도 녀석과 돌아다니면서 아 이 아이 정말 많이 바뀌고 있구나 라는 것을 종종 느낄 수 있었다. 자다가도 작은 인기척에도 벌떡벌떡 놀라며 깨던 아이가 쉬는 시간 끝나는 종소리에도 곤히 자는 모습을 보면서, 밝게 웃으며 연예인 이야기를 하는 평범한 학생인 녀석을 볼 때에도, 몸 곳곳에 있던 멍이 옅어지는 모습을 볼 때에도, 녀석을 위해 늘 들고 다니던 후시딘과 반창고를 종종 잊는 내 모습을 볼 때에도.

 

 

어떤 날은 그런 얘기도 하곤 했다. 어릴 때 잠깐 행복했던 그 기억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일거라고 생각하고 매달려 살았는데, 이렇게 아무 일 없이 평탄한 매일을 보내다 보니, 안보이던 것도 보이고 남이 주는 사랑과 배려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고. 그래서 행복했던 그 순간보다 더 행복한 날이 매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세월이 지나고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제는 서로에게 예전처럼 모든 것들을 공유할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20대의 언저리에 있는 우리지만 그런 우리의 관계에도 확실한 하나는 내 작은 용기와 관심이 어떤 한 사람의 인생 전부는 아닐지라도 미래의 한 부분에 작은 빛이 되어 길을 비추는 한 순간은 되었다는 사실이며 세상 누구도 그 빛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씩 핸드폰으로 주고받는 연락에도 아버지와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것 같기도 하다는 녀석의 희망이 가득한 목소리가 담긴 통화에도, 평범한 생활을 꿈꾸던 작은 소녀가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남들 다 하는 취업걱정에, 연애 상담을 받으며 눈물을 쏟아내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속의 투정을 종종 털어놓기도 하고 그것을 목결할 때 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쩌면 나는 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누군가는 이런 평범한 일상을 꿈처럼 그리기도 하며 그 사람이 그 평범함이라는 어렵고도 쉬운 단어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 속에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하나의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 사실에 한없이 모든 세상에 감사한다. 녀석과 같이 지금도 사계절을 추위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작은 불씨들에게 더 큰 빛을 낼 수 있도록 모두가 한 발짝씩 더 다가가 이 사회 전체에 큰 빛을 비추는 어느 날이 오기를, 그리하여 모두에게 따스한 봄이 오기를 바라는 어느 밤이다.

 

 

  • 많이 춥지? 그래도 봄은 올거야

  • 수상자 : 김후림

  •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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